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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복사 2016-03-18 09: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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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전 오늘…恨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잠들다
글쓴이 :관리자
조회수 : 689

출처: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6031113321346227&outlink=1

 

72년 전 오늘…恨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잠들다

[역사 속 오늘]기모노 속 2·8 독립선언서 감춰 들어와 3·1운동 이끌어낸 '김마리아' 선생 타계

 

72년 전 오늘…恨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잠들다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1919년 9월 김마리아가 작성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

일제 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대개 3·1 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한국의 잔다르크'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또 있다. 3·1운동의 불꽃을 피운 김마리아 선생이다.

김마리아 선생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애국지사였던 부친과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랐다. 정신여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당시 삼촌 김필순의 집에 살았는데 이때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을 보며 조국애를 더욱 키워 갔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해 수학을 가르쳤는데 교장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됐다.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독립의 기회로 이용하기 위해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계획이 3·1운동의 원동력이 된 2·8독립선언이다.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했다. 대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다행히 석방된 선생은 독립운동이 국내로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중요함을 확신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춰 한국에 들여오기로 했다.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선 감시가 덜한 여학생이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고 이를 기모노 속에 감춰 조국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부산·대구·대전·광주·서울·황해도 등을 다니며 거국적으로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배후 지도자로 지목됐고 약 6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출소 후에도 선생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감시로 침체돼 있던 여성 독립운동 단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했다.

서울·대구·부산·전주·진주·평양·원산 등 전국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했고 2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 활동을 벌여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또다시 3년형을 받은 그는 수감생활 동안 일제의 고문을 받다 결국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중국에 넘어간 뒤에도 상하이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해 활동했고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에선 여성 최초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상하이에선 각 독립운동단체들간 파벌 싸움 등이 계속돼 독립운동이 쉽지 않았다. 결국 선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하고 그해 6월21일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미국 미네소타주 파크빌시에 있는 파크대학에 입학, 2년간 공부를 마치고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해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에도 함께 공부하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해 운동을 이어갔다. 13년 후 귀국했지만 일본의 감시와 압박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해 강의를 했다.

이때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투쟁을 이어간 김마리아 선생은 1944년 3월13일 조국 광복을 앞두고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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