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바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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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철(金 澈) (1886) ~1934. 6. 29 號 : 一江 이명 : 金重淸・金永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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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활동
임시정부 이동기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은 김철 선생은 김구ㆍ엄항섭ㆍ안공근과 같이 상하이의 미국인 피치 부인집에 은거하였다가, 5월 10일 항저우로 피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하였으며,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약 8년간 항저우-자싱-전장-광저우-류저우-치장 등지를 옮겨 다니며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철 선생은 항저우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판공처를 개설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업무를 재개하였다. 이러한 김철 선생의 활동으로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법통을 유지할 수있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34년 다시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며,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임시정부는 군사양성을 위해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파견하여 군사 간부로 육성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하였다. 또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하였다. 이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35년 한국국민당을 경성하고, 1937년에는 한국 광복운동단체 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39년에는 좌우합작을 위한 기본합의를 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활동은 비록 끝없는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조국 광복을 이루려는 노력의 결실들이었으며, 이후 1940년 충칭에 정착한 후 한국광복군 조직, 좌우합작 성공등의 결과를 맺기 위한 과정들이었다.
임시정부이동기
임시정부의 생활상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인 하층 노동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는 등 그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생활의 곤궁에 굴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며 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등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고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21년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약 700여명에 달하였으며, 대부분의 한인들은 공장 직공이나 인삼장사, 잡화상, 노동에 종사하며 근근히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더욱이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러한 직업마저 갖기 힘든 형편으로 아는 사람에게 얻은 생활비로 근근히 생활하였고, 몇 사람이 좁은 골방에 함께 기거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당시 생활을 묘사한 글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정부의 명의조차 유지할 길이 막연하였다....몸뚱이와 그림자만 서로 벅하는 신세로 잠은 정청(政聽:임시정부 청사)에서 자고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는 상등 거지였다."김구부인무덤
-김구,백범일지 중에서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어머님께서는 매일 저녁 밤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 중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하여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나는 몇 분 동지들과 같이 할며 어머님이 담아주신 우거지 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김구,백범일지 중에서
"너나할 것 없이 임정의 그늘 아래 몸 드리우고 사는 사람은 헝겊신마저도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백범(김구)같은 분은 여기저기 다니기를 잘하니까 그 헝겊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바닥은 다 닮아 너덜거리니 명색만 신발 바닥이고 신발 목 부분만 성한 채로 매달려 있는 꼴있었다."
-정정화,녹두꽃 _정강일기 중에서
"...백범은 워낙 체격이 좋고 우람하여 식사의 양이 좀 큰 편이었다.어쩌다 자금이 좀 생기면 임정의 살림 비용뿐만 아니라 백범이 책임 맡고 있는 애국단의 폭탄이나 무기 장만 등의 비용에 우선적으로 쓰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먹고 사는 게 늘 어려웠다."
-정정화,녹두꽃 _정강일기 중에서
임시정부 렌화츠(蓮花注)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한한 임시정부는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각종 조국 광복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독립운동 단체의 중심으로서 국내외 모든 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세력을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10월에는 임시헌법을 개정하고 주석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었다. 충칭에 정착한 후 좌익진영 독립운동 세력과의 통일도 실현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익 세력의 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1941년 11월 광복 후의 국가 건설 계획을 담은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 공포하고 독립운동 지도이념을 정립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2월에는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이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전후(戰後)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이었고, 중국ㆍ영국ㆍ미국 등 연합군과 연계를 맺으며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렌화츠
한국광복군의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대일항전에 참전할 부대 편성을 계획하고, 1940년 9월17일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貧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였다
광복군은 총사령관 지청천을 중심으로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창설 이후한국 청년전지공작대와 조선의용대,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하면서 점차 규모를 확대하였다. 이들은 중국각처에서 중국군과 활동하였으며, 1942년부터는 영국군과 함께 인도ㆍ미얀마 전선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의 조직